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트리폴리 백국 (문단 편집) === 깊어지는 [[보두앵 4세]]의 병세 === 몇 주 뒤, [[보두앵 4세]]는 그나마 정신을 차렸다. 하지만 갈릴레아는 이미 살라흐 앗 딘의 군대의 침공을 받고 있었다. 왕은 기력을 모아 봉신들을 소집했다. 트리폴리 백작 레몽은 군대를 모아 왕에게 충성을 바쳤다. 갈릴레아에서 보두앵 왕과 그의 소규모 기사들은 살라흐 앗 딘의 대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고, 살라흐 앗 딘은 예루살렘 왕과의 2년 휴전을 맹세할 수 밖에 없었다. 그러나 교활한 살라흐 앗 딘은 이 조약에 레몽이 등장하지 않는 것을 명목으로 백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. 백작은 그와 평화조약을 맹세하고 거금을 바치는 대가를 치렀다. 백작은 이를 악물고 구호기사단과 봉신들을 모아 병력을 증강하는 것 외엔 2년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. 그동안 십자군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. 유럽에서 온 귀족들은 레몽이 [[보두앵 4세]]를 만나러 입조하는 것마져 막아버리려 했고, 갈릴레아 통치를 방해하기도 했다. 거기에 더해 케락의 영주인 [[르노 드 샤티용]]은 템플기사단을 이끌고 성지와 이집트 사이의 아우터요르단 지역에서 무제한 약탈을 벌이며 살라흐 앗 딘을 자극했다. 심지어 샤티용은 병력을 끌고 요르단 강을 건너 살라흐 앗 딘을 공격하자는 주장을 벌이기까지 했다. 레몽은 십자군 영지의 안보공백을 이유로 이를 반대했지만, 예루살렘 영지 내의 유럽파 귀족들은 대다수 찬동하고 나섰다. 결국 레몽은 어쩔수 없이 상당수의 [[예루살렘 왕국]]군의 사령관이 되어 아우터요르단으로 진격할 수 밖에 없었다. 이 때를 노린 [[투르크멘]]들은 반 레몽파 십자군 영주들을 등에 업고 그의 영지인 갈릴레아와 티베리아스를 약탈해 800명의 처녀들을 납치했다. 살라흐 앗 딘도 이 때를 놓칠 리가 없었다. 살라흐 앗 딘의 대군이 티베리아스를 포위한 것이다. 레몽은 요르단강 동부에서 갈릴레아로 넘어오며 중병에 걸렸지만, 결국 [[보두앵 4세]]의 군대와 함께 살라흐 앗 딘의 군대를 몰아낼 수 있었다. 1182년, 이 기세를 몰아 레몽은 오히려 군사 요충지인 보르사를 점령하기까지 했다. 1183년, 결국 [[장기 왕조]]의 마지막 요충지 [[알레포]]를 점령한 살라흐 앗 딘은 십자군을 궁지로 몰기 위해 남하했다. 레몽의 손도 바빠졌다. 그는 보두앵 왕과 함께 1000명이 넘는 기사와 15,000명의 보병을 끌고 북상하여 살라흐 앗 딘과 맞붙었고, 요르단 강을 건너는 살라흐 앗 딘 군대와 맞붙어 승리하기도 했다. 그러나 보두앵의 병세는 심각한 수준으로 이르고, 결국 시빌라의 남편 [[기 드 뤼지냥]]이 섭정이 되게 되었다. 그러자 우르트메르의 십자군 영주들은 기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병력을 후퇴시켰다. 그는 결국 조카 [[보두앵 5세]]를 후계자로 두고 레몽을 새 섭정으로 임명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